한국 스타트업들의 시선이 여의도에서 도쿄 가부토초로 옮겨가고 있다. 코스닥과 코넥스를 넘어 일본 증시를 상장 무대로 선택하는 기업들이 빠르게 늘고 있다. 일본 시장을 단순한 해외 진출지가 아닌, 자본 조달과 기업가치 재평가의 핵심 무대로 삼는 흐름이다.
대표 사례는 국내 IT 기업 지란지교그룹의 일본 자회사 제이시큐리티다. 제이시큐리티는 2025년 12월 도쿄증권거래소 산하 도쿄프로마켓에 상장하며 일본 자본시장에 공식 데뷔했다. 보안 전문 기업인 제이시큐리티는 그룹 계열사의 검증된 보안 솔루션과 자체 개발 기술, 한국 보안 스타트업의 유망 제품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모델을 앞세웠다. 한국 기술을 일본 시장 규격에 맞게 현지화해 공급하는 전략이다. 상장을 계기로 일본 현지 기업으로서의 신뢰와 K보안의 기술력을 동시에 확보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AI 스타트업 올거나이즈의 행보도 상징적이다. 2017년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출발한 올거나이즈는 2021년 본사를 도쿄로 이전하는 결단을 내렸다. 이후 일본 금융권을 중심으로 고객을 확보하며 전체 매출의 70%를 일본에서 창출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일본 시장에서 실체 있는 AI 기업으로 자리 잡은 올거나이즈는 이제 도쿄증권거래소 상장을 다음 목표로 삼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의 배경에는 일본 시장의 급격한 변화가 있다. 한때 팩스와 도장 문화로 상징되던 일본은 정부 주도로 디지털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2030년까지 AI와 반도체 분야에 대규모 투자를 예고했고, 일본 기업 다수가 생성형 AI 도입을 서두르고 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한 상황에서 한국의 AI·SaaS 기업들은 명확한 기회를 포착하고 있다. 일본은 미국처럼 대규모 투자를 통한 확장보다는, 구매력 높은 기업 고객을 기반으로 즉각적인 매출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인 시장으로 평가된다.
소비재 기업들 역시 일본 증시에 주목하고 있다. K컬처 확산과 함께 K뷰티와 패션 브랜드가 일본 유통시장에서 빠르게 존재감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스킨천사 브랜드로 알려진 크레이버코퍼레이션은 일본 직상장을 추진 중이다. 크레이버는 일본에 지주회사를 설립해 한국 사업회사를 지배하는 플립 전략을 택했다. 이는 국내 중복 상장 논란을 피하고, 일본 시장에서 더 높은 기업가치를 인정받기 위한 선택으로 해석된다.
일본 상장의 성공 사례로는 단연 넥슨이 거론된다. 넥슨은 2011년 한국이 아닌 일본 증시에 직상장하며 주목을 받았고, 이후 핵심 IP의 글로벌 확장과 공격적인 인수합병을 통해 시가총액 수조 엔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일본 자본시장이 한국 기업의 성장성과 글로벌 확장 가능성을 얼마나 높게 평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다.
차세대 넥슨 후보로는 올거나이즈와 함께 타임트리가 꼽힌다. 타임트리는 캘린더 공유 서비스를 기반으로 일본 스마트폰 사용자들 사이에서 필수 앱으로 자리 잡았고, 글로벌 가입자 수는 7000만 명을 넘어섰다. 최근에는 일정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에이전틱 AI 기업으로의 전환을 추진하며 새로운 성장 동력을 모색하고 있다. 이 밖에도 스마트 보청기 업체 올리브유니온 등 여러 기업이 일본 현지 증권사를 주관사로 두고 상장을 준비 중이다.
다만 일본 상장이 만능 해법은 아니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일본 증시는 프라임, 스탠다드, 그로스 등 시장별로 상장 요건이 나뉘어 있고, 해외 법인의 상장이나 플립 구조에서는 지배구조와 세금, 준거법 문제가 복잡하게 얽힌다. 보수적인 일본 투자자 문화 속에서 경영진의 신뢰와 장기적 지속 가능성을 입증하지 못할 경우 시장의 평가를 받기 어렵다는 점도 부담이다.
전문가들은 일본 상장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으로 진정성 있는 현지화를 꼽는다. 단기적인 자금 조달이나 엑시트를 목적으로 한 상장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경고다. 일본 시장을 이해하고, 일본 사회와 함께 성장하겠다는 메시지를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전달하느냐가 향후 K스타트업의 도쿄행 성적표를 좌우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