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스스로 세계 질서를 떠받치던 시대의 종언을 공식 문서로 선언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달 초 공개한 국가안보전략(NSS)은 미국이 더 이상 ‘아틀라스’ 역할을 수행하지 않겠다는 인식을 전면에 내세우며 대외전략의 방향 전환을 분명히 했다.
이번 NSS는 새로운 전략의 나열보다 미국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했다는 점에서 파장이 컸다. 미국은 모든 지역과 사안에 개입해 온 과거 접근을 “아무것에도 집중하지 못한 정책”으로 규정하며, 국익 중심의 선택과 집중을 선언했다. 세계 경찰로서의 역할 축소와 비개입주의가 명시적으로 담겼다.
동맹 정책도 변화했다. 미국은 안보 부담을 동맹국에 전가해야 한다는 원칙을 분명히 했고, 한국과 일본의 국방비 증액을 문서에 직접 적시했다. 국방 지출을 늘린 동맹은 혜택을 받지만, 그렇지 못한 국가는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경고도 함께 나왔다. 한국은 국내총생산 대비 3.5% 수준의 국방비 지출을 약속한 국가로 거론됐다.
눈에 띄는 대목은 한반도 문제의 실종이다. NSS에는 북한과 비핵화, 한반도 안보에 대한 언급이 빠졌다. 트럼프 1기와 바이든 행정부 시절 주요 의제로 다뤄졌던 사안이 전략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셈이다. 같은 시기 중국도 군비 통제 백서에서 한반도 비핵화 관련 문구를 삭제했다. 미·중 모두 북핵 문제를 핵심 전략에서 후순위로 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중국을 바라보는 미국의 시선은 이중적이다. 안보 영역에서는 중국을 경쟁국이자 잠재적 적대세력으로 지칭하면서도, 경제 분야에서는 “베이징과의 상호이익이 되는 관계”를 강조했다. 중국과의 협력을 통해 미국 경제를 40조 달러 규모로 키울 수 있다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전면 충돌보다는 관리된 경쟁과 제한적 협력을 병행하겠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워싱턴 내부에서도 중국과의 결전이 이미 지나갔다는 회의론이 확산되고 있다. 중국이 희토류와 공급망 상류를 장악한 현실에서 미국이 실질적 압박 수단을 잃었다는 평가가 잇따른다. NSS는 이런 인식을 반영하듯, 인도·태평양 억지력 강화와 대만 분쟁 억제를 최우선 과제로 제시하면서도 대만의 지위 변경에 대한 기존 표현을 한 단계 낮췄다.
유럽에 대한 시각은 더 급진적이다. 미국은 유럽의 문제를 경제가 아니라 문명과 정체성의 위기로 규정하며 유럽연합을 초국가적 권력으로 비판했다. 일부 나토 국가의 인구 구조 변화까지 거론하며 유럽의 현재 궤도를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럽 내부의 저항 세력 육성을 정책 목표로 언급한 대목은 대서양 동맹의 균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초안 단계에서 미국·중국·러시아·인도·일본 중심의 강대국 협의체 구상이 검토됐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최종안에서는 빠졌지만, 미국이 바라보는 세계 질서에서 유럽의 위상이 크게 낮아졌다는 인식은 분명해졌다.
이번 NSS는 미국이 패권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고백에 가깝다. 전면적 개입 대신 선택적 관여, 중국과의 전면 충돌 대신 투트랙 전략, 동맹에 대한 보호 대신 비용 분담 요구가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아틀라스의 어깨에서 내려온 미국이 어떤 세계 질서를 남길지는 이제 동맹과 경쟁국 모두의 대응에 달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