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타이완은 공식 외교관계가 없는 상황에서도 경제·안보·인적 교류를 중심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특히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재임 중과 퇴임 이후 타이완 문제를 일본의 안보와 직접 연결해 언급하면서 양측 관계의 전략적 성격을 강화한 인물로 평가된다.
일본은 1972년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타이완과 공식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현재 일본 정부는 타이완과의 관계를 1972년 일중 공동성명을 기초로 한 ‘비정부 간 실무 관계’로 규정하고 있다. 일본 외무성도 이 같은 기본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고 반복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외교관계가 없다는 사실과 실제 일본·타이완 관계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경제와 관광, 반도체 공급망, 재난 대응, 안보 문제 등을 중심으로 양측의 협력은 꾸준히 확대됐다.
이 같은 흐름에서 아베 전 총리는 일본 정치권에서 타이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가장 적극적으로 제기한 정치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아베 전 총리가 타이완 문제에서 남긴 가장 상징적인 발언은 2021년 12월 나왔다. 총리 퇴임 후 그는 타이완 관련 행사에서 “대만 유사시는 일본의 유사시이며 미일동맹의 유사시”라는 취지로 발언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아베의 발언이 정부 공식 입장과 동일하다고 규정하지는 않았다. 일본 외무성은 일본의 타이완 정책이 1972년 일중 공동성명을 기반으로 한다는 기존 입장을 유지했다. 그러나 전직 총리이자 당시 집권 자민당 최대 파벌을 이끌던 아베의 발언이라는 점에서 일본 국내외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아베가 타이완 문제를 일본 안보와 연결한 배경에는 지리적 현실이 있다.
타이완과 일본 최서단 요나구니섬 사이의 거리는 약 110㎞에 불과하다. 타이완해협에서 군사 충돌이 발생할 경우 오키나와를 비롯한 일본 난세이제도와 주일미군 기지가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오키나와에는 미군의 주요 시설이 집중돼 있다. 이에 따라 타이완해협에서 미국과 중국 사이의 군사적 충돌이 발생할 경우 일본이 완전히 분리된 상태로 남기는 어렵다는 것이 일본 안보 논의의 중요한 전제가 됐다.
아베 정부가 추진한 일본 안보정책 변화도 이러한 맥락과 연결된다.
아베 내각은 2015년 안보 관련 법제를 통해 일본이 일정한 조건에서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는 전후 일본의 안보정책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아베는 이후 타이완 문제에서도 일본과 미국의 안보가 분리될 수 없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따라서 그의 ‘대만 유사시는 일본 유사시’ 발언은 단순한 친타이완 메시지가 아니라 자신이 추진해 온 미일동맹 강화와 일본 안보정책 변화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아베와 타이완 정치권의 개인적 관계도 깊었다.
차이잉원 당시 타이완 총통은 2022년 아베 사망 이후 그를 오랜 친구이자 타이완의 확고한 지지자로 평가했다. 타이완 총통부는 아베가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일본과 타이완 관계 발전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아베와 차이잉원은 아베 사망 불과 몇 달 전인 2022년 3월 화상 회담을 갖기도 했다. 당시 두 사람은 재난·감염병 대응과 타이완의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문제, 우크라이나 정세,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과 타이완해협의 평화와 안정 등을 논의했다.
아베가 추진했던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구상 역시 일본과 타이완 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중국의 해양 진출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일본은 미국·호주·인도 등과 협력을 강화했고, 민주주의와 법치, 항행의 자유 등을 인도·태평양 질서의 핵심 가치로 제시했다.
타이완은 공식적으로 이 협력체계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어 일본의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점차 중요한 존재로 부상했다.
경제안보 측면에서도 타이완의 중요성은 커졌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 업체 TSMC가 일본 구마모토현에 생산거점을 구축하면서 일본과 타이완의 반도체 협력은 양국 관계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았다. 반도체와 첨단기술 공급망 안정이 국가안보 문제로까지 확대되면서 일본과 타이완 관계는 과거 관광과 민간교류 중심에서 경제안보 협력으로 범위가 넓어졌다.
아베 사망 이후에도 일본의 타이완 정책에서 그의 정치적 유산은 계속 나타나고 있다.
2026년 현재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타이완 문제에 대한 기존 입장을 유지하면서 “타이완해협의 평화와 안정은 국제사회 전체에 중요하다”는 표현을 반복하고 있다. 일본은 동시에 타이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과 미국, 한국 역시 2026년 7월 외교장관 회담에서 타이완해협의 평화와 안정의 중요성을 재확인했다. 타이완 문제가 더 이상 일본과 중국만의 양자 문제가 아니라 동북아시아와 인도·태평양 안보 의제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외교부)
다만 일본 정부가 타이완 독립을 공식적으로 지지하거나 타이완을 국가로 승인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꾼 것은 아니다.
일본 정부는 1972년 일중 공동성명에 따른 대중국·대만 정책의 기본 틀을 유지하고 있으며, 타이완과의 관계 역시 공식적으로는 비정부 간 실무 관계라는 입장이다.
결국 아베 신조의 역할은 일본과 타이완의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바꾼 데 있지 않다.
그가 남긴 가장 큰 변화는 타이완 문제를 일본 정치에서 하나의 외교 현안이 아니라 일본의 국가안보와 미일동맹, 인도·태평양 전략에 직결된 문제로 끌어올렸다는 점이다.
아베 이전에도 일본과 타이완은 가까웠지만 아베 이후 일본 정치권에서 ‘타이완해협의 안정이 일본의 안보와 직결된다’는 인식은 더욱 선명해졌다.
현재 일본 정부가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반복적으로 타이완해협의 평화와 안정을 강조하는 배경에는 이러한 전략적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아베 신조는 일본과 타이완을 공식적인 동맹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그러나 양측의 관계를 친선과 경제교류의 차원을 넘어 안보와 경제안보를 공유하는 전략적 관계로 인식하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