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기업 경영진의 경영 판단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에 상한을 두는 방향으로 회사법 개정에 착수했다. 인공지능(AI)·반도체·탈탄소 분야 등 대규모 투자 산업에서 경영진의 법적 부담을 줄여 공격적인 투자와 인수합병(M&A)을 유도하겠다는 취지다. 중대재해처벌법과 노란봉투법 시행으로 기업 경영진 책임이 강화되는 한국과 대조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10일 일본 경제지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현재 사외이사에 한정된 ‘책임 제한 계약’ 제도를 대표이사와 일반 사내이사까지 확대하는 방향으로 관련 회사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르면 내년 시행이 목표다.
개정안이 시행되면 일본 기업 경영진은 회사와 계약을 맺고 일정 범위 내에서 손해배상 책임을 제한받을 수 있게 된다. 고의나 중대한 과실 없이 선의로 이뤄진 경영 판단에 대해 무제한 책임을 지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책임 상한 기준으로 현행 회사법상 ‘최저 책임 한도’를 검토 중이다. 현행법은 대표이사의 경우 연간 보수의 6배, 일반 업무집행이사는 연봉의 4배 수준까지 책임을 부담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구체적 상한은 기업별 계약을 통해 정할 가능성이 크다.
일본 정부는 이번 제도 개편을 단순한 법률 정비가 아니라 투자 활성화 정책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AI·반도체·탈탄소 산업처럼 대규모 선행 투자가 필요한 분야에서 과도한 사후 책임 부담이 기업 경쟁력을 약화시킨다고 판단한 것이다.
특히 미국식 기업 환경을 참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에서는 경영진이 고의적 부정행위나 이해상충이 없는 한 일반적 경영 판단에 대해 폭넓게 보호받는 문화가 정착돼 있다. 델라웨어주는 이사 책임 제한을 허용하고 있으며 네바다주는 사기나 고의가 아닌 경우 이사 책임을 원칙적으로 면제한다.
이번 논의의 직접적 계기는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관련 초대형 손해배상 판결이었다. 도쿄지방법원은 2022년 주주대표소송에서 도쿄전력홀딩스 전 경영진 4명에게 총 13조3210억엔 규모 배상을 명령했다. 이후 항소심에서 판결은 뒤집혔지만 일본 재계에서는 “경영 판단에 대한 무제한 책임 가능성이 투자 위축으로 이어진다”는 우려가 확산됐다.
실제 판결 이후 일본에서는 임원배상책임보험(D&O 보험) 가입이 급증했다. 다만 일본 정부는 보험만으로는 경영진 부담 완화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있다. 법무성 산하 법제심의회는 “대규모 소송이 발생할 경우 보험 보장 한도를 초과해 결국 경영진 개인 부담이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한국은 경영진 책임이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흐름이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으로 산업재해 발생 시 대표이사 형사처벌 가능성이 커졌고 노란봉투법 시행으로 사용자 책임 범위도 확대됐다. 상법 개정 논의 역시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재계에서는 배임죄 폐지 논의가 진행 중이지만 형사처벌 중심 구조 자체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과 일본이 경영 판단 문제를 주로 민사 영역에서 다루는 것과 달리 한국은 검찰 수사와 형사재판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많아 기업 부담이 상대적으로 크다는 평가다.
전문가들은 일본이 장기 침체 탈출과 투자 활성화를 위해 기업가정신 회복에 정책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한국은 노동·안전·지배구조 측면의 사회적 책임 강화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분석한다.
재계 관계자는 “미국과 일본은 기업가정신과 리스크 감수를 성장 전략의 핵심으로 보고 경영진 보호 장치를 강화하는 추세”라며 “한국은 형사책임과 규제 강화 기조가 이어지면서 신사업 투자와 의사결정 부담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