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MW 자동차의 앞모습을 상징하는 ‘키드니 그릴’이 시대에 따라 기능과 형태를 바꾸며 진화하고 있다. 엔진을 식히기 위한 공기 흡입구로 출발한 그릴은 전동화 시대를 맞아 조명과 각종 센서를 결합한 디지털 인터페이스로 변모했다.
BMW 키드니 그릴이 양산차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33년 출시된 BMW 303이다. 두 개의 세로형 그릴을 나란히 배치한 모습이 신장과 닮아 ‘키드니 그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당시에는 엔진 냉각을 위한 기능적 부품이면서 차량의 중심을 강조하는 디자인 요소였다.
1930년대 BMW 328 등 스포츠카에도 높고 좁은 형태의 그릴이 적용됐다. 차체 전면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세로 길이가 길었고, 좌우로 분리된 구조를 통해 멀리서도 BMW임을 알아볼 수 있게 했다.
1950년대에는 차종의 성격에 따라 그릴 디자인이 달라졌다. BMW 501과 502는 전통적인 세로형 키드니 그릴을 유지했지만, 1956년 등장한 BMW 507 로드스터는 낮고 넓은 형태를 채택했다. 차체 높이가 낮은 스포츠카의 비율에 맞춰 키드니 그릴이 수평으로 확장된 것이다.
1961년 공개된 BMW 1500 ‘노이에 클라세’는 현대 BMW 세단 디자인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중앙에는 비교적 작은 키드니 그릴을 배치하고, 좌우에 넓은 수평형 라디에이터 그릴과 원형 헤드램프를 연결했다. 이후 이 구성은 3·5·7시리즈로 이어지는 BMW 세단의 기본 얼굴이 됐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키드니 그릴의 크기가 작아졌다. 상어의 코처럼 앞쪽으로 기울어진 이른바 ‘샤크 노즈’ 디자인과 원형 헤드램프가 강조됐고, 키드니 그릴은 차량 중심을 표시하는 상징적인 역할을 맡았다.
1990년대 들어 그릴은 다시 넓어졌다. 차체가 커지고 고급차 시장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키드니 그릴에는 입체감과 크롬 장식이 더해졌다. 7시리즈와 5시리즈는 좌우 폭을 키운 그릴을 적용했고, 3시리즈 역시 세대교체 때마다 그릴과 헤드램프의 연결성을 강화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차종별 차별화가 본격화됐다. 세단은 넓고 낮은 형태, 스포츠유틸리티차량은 크고 높은 형태, 쿠페는 공격적인 형태를 채택했다. 그릴 내부에 공기 흐름을 자동으로 조절하는 액티브 에어 플랩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냉각이 필요하지 않을 때 그릴을 닫아 공기저항을 줄이는 방식이다.
2013년 출시된 전기차 BMW i3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스포츠카 i8은 또 다른 변화를 보여줬다. 내연기관차처럼 많은 냉각 공기가 필요하지 않아 그릴 상당 부분을 막았지만, BMW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키드니 형태는 남겼다. 이때부터 그릴은 공기 흡입구보다 브랜드를 나타내는 시각적 장치로서 성격이 강해졌다.
2019년 공개된 대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 X7과 7시리즈 부분변경 모델은 대형 그릴 시대를 열었다. 2020년 등장한 4시리즈는 번호판 아래까지 내려오는 세로형 그릴을 채택해 논쟁을 불러왔다. 일부 소비자는 1930년대 BMW의 세로형 그릴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고 평가했지만, 지나치게 크다는 비판도 이어졌다.
전기차 iX와 i4에서는 그릴의 기능이 다시 바뀌었다. 막혀 있는 그릴 내부에 카메라와 레이더 등 주행 보조장치용 센서를 배치했다. 일부 고급 모델에는 그릴 외곽을 밝히는 조명 기능도 도입됐다. 과거 엔진으로 공기를 보내던 통로가 차량 주변을 인식하고 운전자와 소통하는 전자장비 공간이 된 셈이다.
BMW는 차종별로 그릴의 방향도 달리했다. 4시리즈와 M3·M4는 세로형 그릴을, 7시리즈와 XM은 크고 넓은 그릴을 적용했다. 반면 2023년 공개한 비전 노이어 클라세 콘셉트와 2025년 공개한 신형 iX3에서는 크기를 줄이고 조명과 결합한 디자인을 제시했다.
2026년 공개된 노이어 클라세 기반 신형 i3 세단도 키드니 그릴과 네 개의 조명 요소를 하나의 그래픽으로 통합했다. 그릴을 단순히 크게 만드는 방식에서 벗어나 빛과 센서, 차체 면을 이용해 BMW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방향이다.
BMW 키드니 그릴의 변화는 자동차 산업의 기술 변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1933년에는 엔진을 식히는 부품이었고, 이후에는 브랜드와 차급을 드러내는 장식이 됐다. 전기차 시대에는 조명과 센서를 품은 디지털 전면부로 역할이 확대됐다.
크기와 형태를 둘러싼 논쟁은 계속되고 있지만, 두 개로 나뉜 기본 구조만큼은 90년 넘게 유지되고 있다. BMW가 시대마다 그릴의 크기를 바꾸면서도 키드니 형태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이 디자인이 단순한 부품을 넘어 브랜드를 식별하는 가장 강력한 상징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