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의 기억 지우는 일본, 남태평양 네트워크 넓힌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호주에 있는 아베 신조 추모비에 헌화하는 장면은 여러 의미를 겹쳐 보여준다.

호주와 일본은 태평양전쟁 당시 깊은 적대의 기억을 공유한 나라다. 일본군은 파푸아뉴기니를 발판 삼아 호주 북부까지 위협했고, 1942년 다윈 공습으로 호주 본토를 직접 타격했다. 외세 침공 경험이 거의 없었던 호주 사회에 이는 국가적 충격이었다.

태국-버마 철도 건설 현장에는 약 2만2000명의 호주군 포로가 투입됐다. 영화 ‘콰이강의 다리’로 알려진 그 현장에서 수많은 연합군 포로들이 강제노동과 학대를 겪었다. 태평양 전역에서 일본군과 싸운 호주군은 결국 1945년 도쿄만 미주리함 항복 조인식에도 연합국 일원으로 참석했다. 수많은 항일 서사를 남긴 조선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런 역사 위에서 다카이치 총리는 호주 한복판의 아베 추모비를 찾아 호주 측 인사들과 함께 헌화했다. 단순한 추모 이상의 장면이다. 전쟁의 기억보다 현재의 전략적 이해가 앞선다는 선언에 가깝다.

실제 양국은 희토류 개발 투자와 공급망 협력 확대를 약속하며 관계를 준동맹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중국 의존도를 낮추려는 일본 입장에선 호주의 광물 자원이 필수적이다. 호주 역시 중국과의 갈등 이후 안보·경제 양면에서 일본과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주도했던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구상이 있다. 일본과 호주는 이제 미국과 함께 이 구상의 핵심 축으로 묶인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 뉴질랜드에서는 위안부상 설치 계획이 좌절됐다. 오클랜드 지역사회 의견 수렴 과정에서 약 60%가 반대 의견을 냈다고 한다. 물론 해당 사업은 한국 정부 차원의 공식 프로젝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이 남태평양 지역에서 외교·안보 영향력을 넓혀가는 흐름과 무관하게 보기 어려운 대목이다.

같은 시기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은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필리핀을 잇달아 방문했다. 필리핀에서는 사실상 중국을 겨냥한 남중국해 다국적 연합훈련 ‘발리카탄 26’을 참관했다. 미국과 필리핀 외에도 호주·뉴질랜드·캐나다·프랑스 등이 참가했고, 일본 자위대 역시 역대 최대 규모인 약 1400명을 파견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인도네시아와 방위협력 확대 협정에도 서명했다. 양국은 ‘통합방위대화 메커니즘’ 신설에 합의했고, 인도네시아는 해상자위대 퇴역 잠수함 도입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일본의 최대 연휴 기간, 다카이치 내각을 대표하는 두 정치인은 각각 태평양 동쪽과 서쪽을 오갔다. 행선지 자체가 메시지였다. 중국의 해양 진출과 경제적 압박에 맞서 인도·태평양 전역의 안보 네트워크를 촘촘히 엮겠다는 신호다.

전쟁의 기억은 남아 있지만, 국제정치는 이미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일본은 과거의 적국들과 안보 협력망을 구축하며 남태평양 질서 재편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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