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부가 추진하는 비수도권 균형발전 정책의 핵심 과제로 떠오른 호남권 반도체 공장 유치 문제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단순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호남에 공장을 신설할지 여부를 넘어, 반도체 생산의 핵심인 전공정 팹을 유치할 것인지, 아니면 패키징 중심의 후공정 시설을 유치할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확산되고 있다.
정치권과 정부는 지역균형발전 차원에서 광주·전남권 반도체 투자 확대를 기대하고 있지만, 기업들은 경제성과 산업 생태계 측면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최근 일본 도쿄에서 열린 닛케이포럼에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이후의 투자 입지는 국내에 한정되지 않을 수 있다”며 해외 투자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그는 인공지능(AI) 수요 증가에 따른 생산시설 확대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어디에 공장을 짓는 것이 가장 유익한지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역시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찬희 삼성 준법감시위원장은 최근 “기업의 지속가능성과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며 “정치적 논리에 좌우되지 않는 투자가 중요하다”고 밝혔다.
반면 정부와 정치권은 지역 균형발전 차원에서 호남권 신규 반도체 투자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오는 29일 주요 기업 총수들과의 간담회에서 비수도권 투자 확대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현재 업계에서는 광주 지역에 첨단 패키징 시설을 구축하는 방안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거론된다. 광주에는 이미 세계적인 반도체 패키징 기업인 앰코테크놀로지코리아가 대규모 사업장을 운영하고 있어 관련 산업 인프라가 구축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역사회에서는 후공정 공장만으로는 기대했던 경제효과를 얻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높다. 전공정 팹은 수만 명 규모의 직접·간접 고용과 수백 개의 소재·부품·장비 기업 집적 효과를 가져오지만, 패키징 공장은 상대적으로 투자 규모와 고용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주장이다.
특히 호남권은 풍부한 태양광·풍력 자원을 바탕으로 RE100 대응에 유리하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재생에너지 사용 확대를 요구받는 상황에서 장기적으로는 호남이 첨단 반도체 생산 거점이 될 수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현실적인 장벽도 적지 않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미 경기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이다. 삼성전자는 화성·평택·용인을 연결하는 생산벨트를 구축했고, SK하이닉스는 이천·청주·용인을 잇는 생산 체계를 완성하고 있다.
전공정 팹은 공장 한 곳 건설에만 수십조 원이 투입되고 수백 개 협력업체의 동반 입주가 필요하다. 이미 용인 클러스터에 막대한 투자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별도의 신규 전공정 거점을 호남에 조성하는 것은 기업 입장에서 상당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정부가 지역균형발전이라는 정책 목표와 기업의 투자 효율성 사이에서 어떤 절충안을 마련할지가 최대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호남권이 요구하는 전공정 팹 유치와 기업들이 검토하는 후공정 중심 투자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좁힐지가 향후 반도체 산업 정책의 중요한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